올드보이 (2003) –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조작된 삶 속 인간의 허상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핵심을 겨눈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믿음을 해체한다. 주인공 오대수는 감정과 행동, 사랑까지 설계된 세계 안에서 무력한 배우에 불과하다.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1. 감정조차 시나리오의 일부일 때, 인간은 누구인가 오대수는 이유 없이 15년 동안 감금된다. 그리고 갑자기 풀려난다. 이 초현실적인 전개는 단지 복수의 극적 장치가 아니다. 오대수가 겪는 고통은 그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가 아니라, 철저히 타인에 의해 통제된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그 모든 결정은 결국 이우진이라는 인물의 의도에 의해 유도된 것이다. 그는 사랑을 느끼고,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 감정조차도 조작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에 가깝다. 특히 그가 사랑한 여성이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은 영화 내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자, 감정의 주체마저 외부에 의해 설정될 수 있다는 철학적 메시지의 정점이다.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하고 개인적인 감정이 타인의 복수 시나리오에 불과할 수 있다면, 인간은 과연 자율적 존재라 할 수 있을까? 박찬욱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한다.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구성되지만, 그 선택들이 실제로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대수는 그 질문 앞에서 무너진다. 그는 자신이 만든 줄 알았던 인생이 사실 타인의 각본에 불과했다는 사실 앞에 말문을 잃는다. 그리고 그 말문을 닫기 위해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 말할 수 없는 진실은, 때로 침묵보다 더 잔혹하다. 2. 심리적 감금과 설계된 현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혼란 오대수는 풀려난 이후에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감금 당시보다 더 강력한 심리적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정보를 얻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모두 철저히 계획된 흐름 속에서 발생한다. 겉보기엔 자유...